문화유산 > 국보/보물 > 보물 | 좌수영대첩비(左水營大捷碑)
관련링크
- 소개
- 이용안내
- 찾아오시는길
- 참고자료
충무공 이순신의 공훈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대첩비이다. 전라남도 해남의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와 함께 일제의 박해로 1942년 서울로 운반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가, 광복 이후 해남지역 유지들의 수소문으로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 속에서 찾아내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비(碑)는 한 돌로 이루어진 바닥돌 위에 거북받침돌을 두고, 비몸을 세운 후 구름과 용, 연꽃 등이 조각된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의 글은 당시 이름을 날렸던 이항복이 짓고, 글씨는 명필 김현성이 썼으며, 비몸 윗면의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는 비 명칭은 김상용의 글씨이다.
조선 광해군 7년(1615)에 세워졌으며, 비의 왼쪽에는 숙종 24년(1698) 남구만이 지은 비의 건립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에는 이순신의 막료로 활약하였던 수군통제사 유형과 좌수영지역의 유지 및 후손들의 노력으로 건립하게 된 경위를 비롯하여, 이 때 타루비(보물 제1288호)도 대첩비 옆으로 옮겨 세우고, 비각을 세워 보존하였다는 비 건립 전후의 기록이 밝혀져 있다.
비(碑)는 한 돌로 이루어진 바닥돌 위에 거북받침돌을 두고, 비몸을 세운 후 구름과 용, 연꽃 등이 조각된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의 글은 당시 이름을 날렸던 이항복이 짓고, 글씨는 명필 김현성이 썼으며, 비몸 윗면의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는 비 명칭은 김상용의 글씨이다.
조선 광해군 7년(1615)에 세워졌으며, 비의 왼쪽에는 숙종 24년(1698) 남구만이 지은 비의 건립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에는 이순신의 막료로 활약하였던 수군통제사 유형과 좌수영지역의 유지 및 후손들의 노력으로 건립하게 된 경위를 비롯하여, 이 때 타루비(보물 제1288호)도 대첩비 옆으로 옮겨 세우고, 비각을 세워 보존하였다는 비 건립 전후의 기록이 밝혀져 있다.
좌수영대첩비(左水營大捷碑)는 조선 광해군 7년(1615년)에 삼도수군 통제영이 있었던 여수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장군(1545~1598)의 공훈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대첩비이다.
이 비는 일제침략기(日帝侵略期)에 일제(日帝)가 이 땅의 민족혼을 말살시키려는 최후의 발악으로 이른바 반일(反日) 내용이 담긴 고적(古蹟)들을 소관(所管) 경찰부장들 임의로 철거시켜도 좋다는 비밀 지령을 내리기 이전인 1942년에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타루비(墮淚碑)」와 함께 이미 원 위치에 없었다. 당시 주민들은 비가 일정(日政)의 총독부 명령으로 서울로 운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일제(日帝)가 패망(敗亡)하고 해방이 되자, 해남(海南)과 여수(麗水)의 지방 주민들은 즉각 서울로 사람을 보내 비(碑)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았는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 앞뜰 땅 속에 깊이 묻혀 있었다. 더욱이 전혀 파괴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던 것을 지방 유지들에 의해 여수읍사무소에 임시로 안치되었다가 1947년 이충무공과 연관된 고소대(姑蘇臺)에 비각을 세워 대첩비, 타루비(보물 제1288호), 동령소갈비(숙종 24년(1698) 건립)와 함께 봉안되었다.
비의 형태는 한 돌로 이루어진 지대석(地臺石)과 귀부(龜趺), 비좌(碑座)위에 비신(碑身)이 서 있으며, 그 위에 운룡(雲龍)과 연화문(蓮花紋)의 이수(이首)가 개석(蓋石)으로 얹혀 있다. 비신(碑身) 상단에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이 전(篆)한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충무공의 노량, 한산, 옥포 등의 해전에서 세운 공적을 기술하고 있는 이 비는 이충무공의 부하로 있다가 전라좌수사, 황해병사를 지낸 유형(柳珩)이 돌을 보내 건립되었는데, 비문(碑文)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이 비는 일제침략기(日帝侵略期)에 일제(日帝)가 이 땅의 민족혼을 말살시키려는 최후의 발악으로 이른바 반일(反日) 내용이 담긴 고적(古蹟)들을 소관(所管) 경찰부장들 임의로 철거시켜도 좋다는 비밀 지령을 내리기 이전인 1942년에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타루비(墮淚碑)」와 함께 이미 원 위치에 없었다. 당시 주민들은 비가 일정(日政)의 총독부 명령으로 서울로 운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일제(日帝)가 패망(敗亡)하고 해방이 되자, 해남(海南)과 여수(麗水)의 지방 주민들은 즉각 서울로 사람을 보내 비(碑)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았는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 앞뜰 땅 속에 깊이 묻혀 있었다. 더욱이 전혀 파괴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던 것을 지방 유지들에 의해 여수읍사무소에 임시로 안치되었다가 1947년 이충무공과 연관된 고소대(姑蘇臺)에 비각을 세워 대첩비, 타루비(보물 제1288호), 동령소갈비(숙종 24년(1698) 건립)와 함께 봉안되었다.
비의 형태는 한 돌로 이루어진 지대석(地臺石)과 귀부(龜趺), 비좌(碑座)위에 비신(碑身)이 서 있으며, 그 위에 운룡(雲龍)과 연화문(蓮花紋)의 이수(이首)가 개석(蓋石)으로 얹혀 있다. 비신(碑身) 상단에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이 전(篆)한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충무공의 노량, 한산, 옥포 등의 해전에서 세운 공적을 기술하고 있는 이 비는 이충무공의 부하로 있다가 전라좌수사, 황해병사를 지낸 유형(柳珩)이 돌을 보내 건립되었는데, 비문(碑文)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