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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줄기가 오음산에서 배미산을 거쳐 대성산에 연결되고, 여기서 비둘기산, 부학산, 동교 뒷산을 거쳐 활목까지 산줄기가 끊기는데 없이 길게 연결되었다고 하여 장산(長山)이라 칭한다. 높은 산은 없고, 산이나 구릉지를 개간하여 밭을 일구고 간사지를 매립하여 논과 염전을 만들어 미맥(米麥) 위주의 영농을 하고 있으며, 해양성기후의 영향을 받아 강우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식물이 잘 자라서 각종 농산물이 생산되고 있다.
어업은 발달하지 않았고, 천해(淺海)의 갯벌을 이용해 연안에는 해태양식업이 활발하다. 장산도는 신안군의 섬들 가운데 가장 남단에 위치하여 해로를 통해 원해(遠海)로 나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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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고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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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은 삼국시대 이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높았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한다. 도창리 석실고분은 장산도의 아미산(배미산,해발142.5m) 동남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1966년 3월에 마을 청년들이 회관을 세우기 위해 흙을 채취하다 우연히 발견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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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거수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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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숲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기다랗게 뻗어 있다. 숲의 길이는 352m 이고 팽나무 63, 곰솔 8, 주엽나무 12, 가죽나무 4, 예덕나무 2그루 등 101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숲의 조성 유래는 첫째, 사창마을에 양곡보관창고가 있어 이 지역 여러 도서의 양곡을 보관하는데 왜구가 침입하여 도적질을 하므로 양곡보관창고를 은폐하기 위해 위장 숲으로 조성하였다는 설과 , 둘째는 도창마을의 겨울바람을 막기 위해 방풍림으로 조성되었다는 설이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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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준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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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준(1893~1972) 선생은 1919년 무안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때문에 일경의 체포령이 내리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재무부 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군자금을 조달하기 우해 국내로 잠입하여 3.1운동1주년 기념식 때 서태석, 표성천, 박복영, 고재빈 등과 유달산에 태극기를 꽂고 만세를 주동했다가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신간회 전남도지회 부회장겸 도대표 의원을 맡았고 광복후에는 한민당 광주지부위원장에 피선되었고 1957년 민주당 전남도당 위원장이 되었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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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목장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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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가의 우마를 사육하던 장소이다. 왕의 가마와 말 외양간과 목장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사복시라는 관부에서 감독관이 배치되어 운영하였다. 장산목장은 망운목장 소속으로 '여지도서'나 주읍지에는 목자가 27명이라 기록되어 '대전회통'의 정원수(21)보다 많은 것으로 보아 타 목장보다 규모가 방대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고, 비소리 말바위에서 배에 실어 한양으로 진상했다고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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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산성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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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산(189m) 정상부에 높이10척, 주위 130칸되는 성이다. 현존하는 성의 높이는 4m, 폭은 2.5m인데 화강암제를 다듬은 돌로 아주 정교하게 쌓아 올렸으며 남벽과 동벽은 대체로 원형이 남아 있으나 서벽과 북벽은 허물어지고 숲속에 가리어져 있다. 축성시기는 백제시대로 추정되나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으며 또한, 이곳에 봉화대를 쌓고 왜병선이 인천방면으로 항해하는 것을 감시하여 당시 한성으로 연락하였다고 하며, 진도 완도와 연결하는 봉화의 주봉 이었다고 한다. | | |